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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의 메카 아듀 ~~~ 경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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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리자
  • DATE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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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이 2021년 12월 27일부로 폐역이 되었습니다.

경주역은 일제 강점기인 1918년 11월 1일 기적을 울리며 개통한 철도의 역사입니다. 103년간 국민의 애환을 뒤로하고 망각의 뒤안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오래된 것의 존재와 가치는 그곳에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이 사라지면 그곳에 담긴 정신과 기억도 퇴색하게 됩니다. 경주역은 학생들에게는 경주 수학여행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경주역에서 출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에 갔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석굴암 법당 안으로 들어가 본존불 앞에서 흑백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수많은 신혼부부들이 신라 천년의 기운을 받으려 경주에 신혼여행을 왔었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보다 더 기억에 남은 경주역입니다. 첫발을 디딘 곳이라 그렇습니다. 허허벌판이라 하여도 역이 만들어지면 사람이 모이고 물산이 쌓이게 됩니다. 경주역은 경주방문의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주시민에게도 생활의 터전이었고, 원근의 물산이 집결하는 장터였습니다. 80년대까지 역 광장에 포석정 모형이 설치되어 있어 망국의 슬픈 신라를 떠올리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역의 기원은 신라 제19대 눌지왕의 굴헐역과 제21대 소지왕 때인 4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정월보름에 오곡밥으로 기원하게 된 것도 소지왕 때라고 합니다. 소지왕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여 준 까마귀에게 찰밥을 바치는 오기제(烏忌祭)를 지냈는데, 그것이 정월 보름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소지왕은 역을 만들었고, 최초로 장터를 여는 등 이른바 민생군주였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역은 공적인 교통·통신기관이었습니다. 역은 공문서 전달과 공무수행자의 쉼터로 이용되었습니다. 왕의 밀명을 받은 암행어사가 말을 바꾸어 타던 곳입니다. 암행어사의 호패에 세 마리 또는 다섯 마리의 말이 그려져 있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총 41개의 역도(驛道)와 이에 예속된 총 524개의 역을 두었는데, 역도에는 현감과 품계가 같은 종6품 찰방(현 역장)이라는 관리를 두었습니다. 초기에는 조선 팔도 각 도에 3개의 역도를 두었고 경상도에만 5개의 역도를 두었다고 합니다. 신녕현(영천) 장수도, 안동 안기도, 문경 유곡도, 포항 송라도, 양산 황산도입니다. 경주역은 장수도 관할에 속해 있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장수도 찰방을 하였고, 영천 의병장 호수 정세아(1535-1612)가 황산도 찰방을 하였다고 합니다. 역 간의 거리는 대략 30리였습니다. 역과 역 사이에는 장승을 세워 방향과 거리를 적어두었다고 합니다. 장승은 원래 이정표로서 오늘날 내비게이션인 셈입니다. 한참이라는 말은 역과 역 사이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참)제는 1896년 1월 대한제국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어릴 적 고개 넘어 서울(청량리)행 간이역이 있었습니다. 먼 길 달려 친정에 온 고모가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시집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어린애의 고단한 걸음으로 철길까지 배웅을 자청하곤 했습니다. 속셈은 그렇게 하여서라도 기차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래전 폐역이 되었지만, 그 철로만 지나쳐도 유년의 설렘이 발동합니다. 하물며 간이역의 존재조차도 그러합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경주역에 대한 애환은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경주시는 ‘도심 뉴타운 개발의 활용’에 버금가는 ‘국민의 역’ 경주역의 역사적 보존방안도 함께 세워야 할 것입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